1.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과학에 일생을 건 과학자로서 당연히 그 답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생물학에 종사하는 전문 생물학자라면 생명을 분자 단위에서 세포단위에서 조직 단위에서 또는 개체 단위에서 집단 단위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가 속한 학제에 따라 설명하는 방식이나 용어 그리고 강조되는 부분이 다소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 설명은 현대 생물학의 범주 안에서 이뤄질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설명이 생명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다소 미심쩍은 사람들은 다른 학제를 거론할 수도 있다. 가령 물리학의 관점에서 또는 화학이나 다른 자연 과학의 관점에서 보다 충분하게 설명하고자 할 수 있다. 생체의 동작과 미세 기관들이 작동하는 메카니즘을 설명하고, 생체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화학 반응을 통해 생체를 이해하거나, 지구의 다양한 공간 속에서 나아가 우주 가운데 놓인 개체들을 분석하며 생체와 생태계가 지니는 특징 등을 논할 수도 있다. 자연 과학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철학이나 종교학 심리학과 같은 인문 과학을 통해 그 답을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존에 대한 논의를 통해, 절대적 존재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인간이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양태에 대한 논의를 통해 생명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경제적 상호 작용이나 정치적 행위 또는 문화적 교류 등에 대한 설명을 통해 생명에 대해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논리 저편에 있는 심미적 지평의 이야기들을 통해 생명이 그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음악 속에서 그림 가운데 우리는 아주 자주 이러한 설명들을 마주 대할 수 있다. 이 모든 노력이 종합되면 ‘생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이 나올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명을 설명하는 모든 논의 저편에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다.
2. 호흡에 대한 느낌
분당 호흡 수는 대략 12-20회 남짓이다. 평균을 16회로 삼아 계산하면 한시간에 천번 하루에 2만 4천번, 일년에 800만번의 호흡을 하게 된다. 팔십년을 살았다고 하면 모두 6억번 남짓 호흡을 한 셈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호흡을 하고 있다. 음식을 통해서 흡수한 글루코스와 호흡을 통해서 흡수한 산소가 만나 반응을 하면 물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인간의 에너지원인 ATP를 만들어 낸다.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들이 마시는 공기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호흡당 500ml 정도라 한다. 분당 8리터, 하루 만리터가 넘는 공기를 들이 마시는 셈이다.
우리는 생존에 아주 필수적인 것일수록 신경을 쓰지 않으며 살아간다. 호흡하는 것과 세수하는 것 사이에 어느 것이 생존에 더 필수적인지는 자명하다. 그리고 어느 것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살아가는지 역시 자명하다. 나 역시 아버님이 ARDS(급성 호흡부전 증후군)로 시달리기 전까지 '호흡한다는 것'이 왜 기적과도 같은 것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놀랍게 단 한번도 거기에 대한 느낌을 가지지 못했다.그러던 것이 아버님의 병고가 진행되는 동안 거의 매일같이 하루도 빠짐 없이 호흡에 대한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생명을 비로소 구체적인 느낌이 있는 생리 현상을 통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생명을 구체적인 생리현상으로부터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참으로 아슬아슬하다. 생명을 이루고 유지시키는 것들 중에 기적아닌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 뿐 아니라 들판의 민들레, 허공의 날벌레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이 한 순간 한순간 유지되는 행간에 차고 넘치는 기적이란 숨 막히는 대지 가득 차고 넘치는 공기처럼 충만한 것이다.
2017년 7월 30일 일요일
2017년 7월 9일 일요일
현대 생물학과 환원주의1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는 사실 간단한 이야기이다. 어떤 입자(또는 물질)를 특정 위치에 고정시키는 순간 그것의 움직임에 대한 표현 가운데 하나인 모멘텀(운동량)을 정확히 알 수 없고 반대로 운동의 모멘텀을 정확히 계산하는 순간 그 물질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얘기이다.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x ∆p ≥ ħ/2 (x는 위치를 p는 운동량을 표현한다.)
하나의 입자에 대한 우리의 물리적 지식이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는 원리이다. 그런데 하나의 입자가 아니라 두개의 입자가 서로 상호 작용하면서 움직이는 것을 계산하는 것은 하나의 입자의 경우와 비교해볼 때 그 복잡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더 나아가 세개 네개 여러 개의 입자들이 존재하는 어떤 계에서 입자들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것은 현대 물리학의 한계를 초과하는 일이 된다. 이 경우는 오로지 확률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약물(화학적 제재) 개발이나 백신 개발이 1990년대 이후 주춤하고 있는 현상을 두고 프랑스의 한 생물학자가 이는 현대 생물학(특히 분자 생물학)이 보이고 있는 환원주의의 한계라는 지적을 하는 논문을 읽었다. 환원주의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물질의 기본 단위는 원자다. 원자들이 모여 분자가 되고 그 분자들이 모여 눈에 보이는 물질이 된다. 따라서 원자나 분자의 속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조정하거나 변모시키면 물질의 물성에 계산된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조금 더 극단으로 몰고가면 원자나 분자에 의해 물질의 물성이 결정된다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환원주의라 할 수 있다. 생물의 경우 생명현상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아닌 생물체의 기본 단위인 유전자라는 주장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이 현대 분자 세포 생물학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물질에 대한 물리적 측정의 한계와 다입자 물질계에 대한 측정의 난해함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생물학이 다루는 생명체에는 다입자 수준의 복잡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복잡성이 내재해 있다. 하나의 세포안에는 수십만가지 유기 무기 분자들이 서로 복잡다단한 네트워크와 컴플렉스를 구성하여 어떤 기능을 발휘한다. 네트워크와 컴플렉스를 구성하는 방식 또한 주어진 상황이 어떠한지에 따라 달라진다. 생체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세포들이 엄격한 질서를 통해 공존하고 세포와 세포가 연결되고 어떤 구조체를 만드는 방식 역시 헤아리기 힘들만치 다양하다. 이러한 생명체를 이해하고 여기에 어떤 조치를 취하거나 변화를 주고자 하는 요구가 있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현대 생물학은 생명체 속의 세포, 세포 속의 분자에 주목하였다. 세포속에는 어떤 분자들이 있는가? 그 분자들의 모양새는 어떠한가? '가'라는 분자는 어떤 다른 물질들과 반응하는가? 그 분자를 없애거나 변형시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 실험의 주된 주제였고, 학과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으로 생명체와 생명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치 어느 행성이나 그 행성이 속한 행성계를 통해 은하계의 원리를 미뤄 짐작하는 것 만큼이나 무모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현대 분자 생물학, 세포 생물학, 생화학의 성과에 대하여 의미없다고 통박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연구)가 어떤 한계를 지녔다고 해서 어느 시점 시대에서 그 연구가 지니고 있는 유의미성이 소거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밀고 나가는데 있다. 한계를 직시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뛰어 넘는 시도가 더할 나위없이 값진 일이겠지만 한계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주 큰 족쇄로 작용하는 법이다. 현대 생물학의 주류는 이러한 한계에 대하여 무척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나는 그러한 소극성의 가장 큰 이유를 과학을 잠식한 이데올로기에 두고 있다. 바로 현대 생물학이 빠져 있는 환원주의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x ∆p ≥ ħ/2 (x는 위치를 p는 운동량을 표현한다.)
하나의 입자에 대한 우리의 물리적 지식이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는 원리이다. 그런데 하나의 입자가 아니라 두개의 입자가 서로 상호 작용하면서 움직이는 것을 계산하는 것은 하나의 입자의 경우와 비교해볼 때 그 복잡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더 나아가 세개 네개 여러 개의 입자들이 존재하는 어떤 계에서 입자들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것은 현대 물리학의 한계를 초과하는 일이 된다. 이 경우는 오로지 확률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약물(화학적 제재) 개발이나 백신 개발이 1990년대 이후 주춤하고 있는 현상을 두고 프랑스의 한 생물학자가 이는 현대 생물학(특히 분자 생물학)이 보이고 있는 환원주의의 한계라는 지적을 하는 논문을 읽었다. 환원주의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물질의 기본 단위는 원자다. 원자들이 모여 분자가 되고 그 분자들이 모여 눈에 보이는 물질이 된다. 따라서 원자나 분자의 속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조정하거나 변모시키면 물질의 물성에 계산된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조금 더 극단으로 몰고가면 원자나 분자에 의해 물질의 물성이 결정된다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환원주의라 할 수 있다. 생물의 경우 생명현상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아닌 생물체의 기본 단위인 유전자라는 주장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이 현대 분자 세포 생물학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물질에 대한 물리적 측정의 한계와 다입자 물질계에 대한 측정의 난해함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생물학이 다루는 생명체에는 다입자 수준의 복잡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복잡성이 내재해 있다. 하나의 세포안에는 수십만가지 유기 무기 분자들이 서로 복잡다단한 네트워크와 컴플렉스를 구성하여 어떤 기능을 발휘한다. 네트워크와 컴플렉스를 구성하는 방식 또한 주어진 상황이 어떠한지에 따라 달라진다. 생체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세포들이 엄격한 질서를 통해 공존하고 세포와 세포가 연결되고 어떤 구조체를 만드는 방식 역시 헤아리기 힘들만치 다양하다. 이러한 생명체를 이해하고 여기에 어떤 조치를 취하거나 변화를 주고자 하는 요구가 있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현대 생물학은 생명체 속의 세포, 세포 속의 분자에 주목하였다. 세포속에는 어떤 분자들이 있는가? 그 분자들의 모양새는 어떠한가? '가'라는 분자는 어떤 다른 물질들과 반응하는가? 그 분자를 없애거나 변형시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 실험의 주된 주제였고, 학과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으로 생명체와 생명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치 어느 행성이나 그 행성이 속한 행성계를 통해 은하계의 원리를 미뤄 짐작하는 것 만큼이나 무모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현대 분자 생물학, 세포 생물학, 생화학의 성과에 대하여 의미없다고 통박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연구)가 어떤 한계를 지녔다고 해서 어느 시점 시대에서 그 연구가 지니고 있는 유의미성이 소거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밀고 나가는데 있다. 한계를 직시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뛰어 넘는 시도가 더할 나위없이 값진 일이겠지만 한계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주 큰 족쇄로 작용하는 법이다. 현대 생물학의 주류는 이러한 한계에 대하여 무척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나는 그러한 소극성의 가장 큰 이유를 과학을 잠식한 이데올로기에 두고 있다. 바로 현대 생물학이 빠져 있는 환원주의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2017년 7월 4일 화요일
Savior siblings를 다시 생각해보며...
벌써 9년전 일이다. '형제 구조자'와 관련된 영국 국회 투표 결과를 인터넷 뉴스로 담담하게 읽던 기억이 바로 어제같다. 그런데 이처럼 생명의 근간을 건드리는 주제는 그저 지나간 주제가 될 수 없다. 누구라도 살아 있는 한 현재진행형이 될 수 밖에 없는 주제이다. 다시 곰곰히 되짚어 보면서 그 당시 쓴 글을 공유하고자 한다.
"오늘 BBC에 뜬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영국 국회에서 두가지 주제와 관련된 투표를 했다는 소식이다. 그 하나가 인수(Human-Animal) 혼성 배아의 허용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제 구조자(Savior siblings)와 관련된 시술을 금지하려는 법안을 기각하는 투표였다. 인수 혼성 배아에 대한 논의는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할 생각이다. 오늘 고민이 집중되었던 주제는 형제 구조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요지는 간단하다. 예를 들어 골수암에 걸렸거나 선천적 기형 등으로 특정 장기의 비가역적 손상이 진행된 형제를 위해서 부모가 그 자녀의 치료를 보조할 목적으로 새로운 자녀를 갖고자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 기존 자녀와 새로 잉태할 자녀 사이에 HLA (Human Leukocyte Antigen) 일치 여부가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이것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 이식과 같은 시술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술을 위해서 새 자녀를 갖고자 할 때는 반드시 IVF (In Vitro Fertilization) 즉 시험관 수정을 통해 자녀를 잉태해야 한다. 시험관 내에서 수정이 이뤄진 배아중 그 배아의 HLA가 아픈 형제의 그것과 일치하는 배아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영국 보수당과 생명운동 관련 시민단체에서 이를 금지시키는 법안을 상정했다가 오늘 영국 국회에서 기각된 것이 사건의 요지이다.
이 주제를 두고 생각하다 세가지 논점 내지 세가지 고민이 떠올랐다.
1. 맞춤형 배아 즉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수정된 배아 중 어떤 특정 배아를 고르는 행위가 타당한가?
2. 하나의 어떤 전인격체를 치료를 목적으로 잉태하는 것은 타당한가?
3. 신체에 대한 자결권을 부모나 타인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것이 타당한가? 새로 태어난 자녀의 자결권은 어디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번 의결에 참가하여 기각에 찬성하는 표를 던진 사람들의 주장은 간결하다. "현재의 의료 기술 수준에 비춰볼 때 치료할 수 있는데 윤리적인 이유만으로 그 가능성을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골수 이식이나 다양한 이식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비춰볼 때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신체 적합성을 갖춘 공여자가 없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허용 가능한 다른 자녀의 희생을 통해 치료를 할 수 있다면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된다. 하지만 앞서 던진 세가지 주제에 대해 그 누구도 쉽사리 타당하다고 답을 할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딜레마의 배후에 한가지 철학적 문제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발달한 현대 의료 기술과 세포 생물학, 분자 생물학, 발생학 그리고 면역학의 수준이 바로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도록 하는 현실적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 곳곳에 이 물음은 똬리를 틀고 있다. 이것은 머릿속 상상이나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떠돌던 질문들이 이제 우리의 침대맡이나 탁자 앞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상의 극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 오늘 영국의 국회의사당에서 있었던 것이다.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낄거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이미 이전 세기 말미부터 Biotechnology는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는 답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가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는 생체를 유전자 수준에서 다양하게 변형시키고 그 결과 여러 유익을 얻고자 애를 쓰고 있다. 대장균, 효모, 쥐, 토끼, 돼지, 젖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많은 종류의 생체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다. 생명의 활용(The use of Life)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 시대 한 복판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생체가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얼마 전부터 여기 저기서 제안되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휴먼 게놈 프로젝트를 가장 먼저 마친 그래그 벤터가 시도한 인간 게놈 유전자 특허라 할 수 있다. 생체의 유전자에 대한 특허는 1980년 미국에서 최초의 인가를 받은 이후 아주 광범위하게 출원되고 인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그 벤터는 이 흐름의 정점에서 인체 정보에 대한 일종의 소유권 등기를 요구했었던 것이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그 정보를 활용하여 생체를 통한 이윤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황우석을 통해 한국에서도 집중적으로 조명받은 적이 있던 BT를 통한 어머어마한 규모의 이윤 창출 논리 역시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뭔가 꺼림찍한 느낌을 지니거나, 답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 시대를 크게 오해하고 있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일 따름이다.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무엇이 현실인지 하는 것을 말할 때는 주관적 판단보다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해야만 한다. 인지했건 그렇지 못했건 간에 우리는 지금 생명을 도구로 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점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무엇이 옳다는 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 나는 솔직히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깊은 의혹과 우려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고백만으론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나는 이미 생명을 도구로 보는 시대 한복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찰이 필요한 때다. 급격한 진보가 이뤄지고 있다고 낙관과 부푼 기대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현실을 너무 모르고 있기 십상일 것이다. 기술 진보의 이면에는 급격히 늘어만 가는 질문들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질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던져졌지만 매번 쉽게 잊혀져 왔다. 이제 그 질문들을 하나 둘씩 꺼내 들고 답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어느 한 사람도 예외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생명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듯이..."
"오늘 BBC에 뜬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영국 국회에서 두가지 주제와 관련된 투표를 했다는 소식이다. 그 하나가 인수(Human-Animal) 혼성 배아의 허용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제 구조자(Savior siblings)와 관련된 시술을 금지하려는 법안을 기각하는 투표였다. 인수 혼성 배아에 대한 논의는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할 생각이다. 오늘 고민이 집중되었던 주제는 형제 구조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요지는 간단하다. 예를 들어 골수암에 걸렸거나 선천적 기형 등으로 특정 장기의 비가역적 손상이 진행된 형제를 위해서 부모가 그 자녀의 치료를 보조할 목적으로 새로운 자녀를 갖고자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 기존 자녀와 새로 잉태할 자녀 사이에 HLA (Human Leukocyte Antigen) 일치 여부가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이것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 이식과 같은 시술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술을 위해서 새 자녀를 갖고자 할 때는 반드시 IVF (In Vitro Fertilization) 즉 시험관 수정을 통해 자녀를 잉태해야 한다. 시험관 내에서 수정이 이뤄진 배아중 그 배아의 HLA가 아픈 형제의 그것과 일치하는 배아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영국 보수당과 생명운동 관련 시민단체에서 이를 금지시키는 법안을 상정했다가 오늘 영국 국회에서 기각된 것이 사건의 요지이다.
이 주제를 두고 생각하다 세가지 논점 내지 세가지 고민이 떠올랐다.
1. 맞춤형 배아 즉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수정된 배아 중 어떤 특정 배아를 고르는 행위가 타당한가?
2. 하나의 어떤 전인격체를 치료를 목적으로 잉태하는 것은 타당한가?
3. 신체에 대한 자결권을 부모나 타인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것이 타당한가? 새로 태어난 자녀의 자결권은 어디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번 의결에 참가하여 기각에 찬성하는 표를 던진 사람들의 주장은 간결하다. "현재의 의료 기술 수준에 비춰볼 때 치료할 수 있는데 윤리적인 이유만으로 그 가능성을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골수 이식이나 다양한 이식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비춰볼 때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신체 적합성을 갖춘 공여자가 없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허용 가능한 다른 자녀의 희생을 통해 치료를 할 수 있다면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된다. 하지만 앞서 던진 세가지 주제에 대해 그 누구도 쉽사리 타당하다고 답을 할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딜레마의 배후에 한가지 철학적 문제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발달한 현대 의료 기술과 세포 생물학, 분자 생물학, 발생학 그리고 면역학의 수준이 바로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도록 하는 현실적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 곳곳에 이 물음은 똬리를 틀고 있다. 이것은 머릿속 상상이나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떠돌던 질문들이 이제 우리의 침대맡이나 탁자 앞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상의 극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 오늘 영국의 국회의사당에서 있었던 것이다.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낄거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이미 이전 세기 말미부터 Biotechnology는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는 답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가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는 생체를 유전자 수준에서 다양하게 변형시키고 그 결과 여러 유익을 얻고자 애를 쓰고 있다. 대장균, 효모, 쥐, 토끼, 돼지, 젖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많은 종류의 생체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다. 생명의 활용(The use of Life)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 시대 한 복판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생체가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얼마 전부터 여기 저기서 제안되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휴먼 게놈 프로젝트를 가장 먼저 마친 그래그 벤터가 시도한 인간 게놈 유전자 특허라 할 수 있다. 생체의 유전자에 대한 특허는 1980년 미국에서 최초의 인가를 받은 이후 아주 광범위하게 출원되고 인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그 벤터는 이 흐름의 정점에서 인체 정보에 대한 일종의 소유권 등기를 요구했었던 것이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그 정보를 활용하여 생체를 통한 이윤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황우석을 통해 한국에서도 집중적으로 조명받은 적이 있던 BT를 통한 어머어마한 규모의 이윤 창출 논리 역시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뭔가 꺼림찍한 느낌을 지니거나, 답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 시대를 크게 오해하고 있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일 따름이다.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무엇이 현실인지 하는 것을 말할 때는 주관적 판단보다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해야만 한다. 인지했건 그렇지 못했건 간에 우리는 지금 생명을 도구로 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점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무엇이 옳다는 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 나는 솔직히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깊은 의혹과 우려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고백만으론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나는 이미 생명을 도구로 보는 시대 한복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찰이 필요한 때다. 급격한 진보가 이뤄지고 있다고 낙관과 부푼 기대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현실을 너무 모르고 있기 십상일 것이다. 기술 진보의 이면에는 급격히 늘어만 가는 질문들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질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던져졌지만 매번 쉽게 잊혀져 왔다. 이제 그 질문들을 하나 둘씩 꺼내 들고 답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어느 한 사람도 예외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생명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듯이..."
2017년 7월 2일 일요일
나의 멘토-세자르 밀슈타인
세자르는 1984년에 단일 클론 항체를 만들어 내는 Hybridoma개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나는 그와 6개월 동안 같은 연구소 비좁은 3층 서로 마주 보이는 실험실에서 연구를 할 수 있었던 행운을 맛보았다. 나는 저녁이면 Mowbray road를 동료와 함께 산책하며 무언가 열심히 토론하던 그를 몰래 뒤 따라 걷다 몇 블록 넘어 있던 집까지 기쁜 마음으로 달음박질 치곤 했다. 내가 박사과정동안 하던 일 (B cell somatic hypermutation)이 그의 일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터라 사실 MRC-LMB를 오기 전부터 그를 만나는 것을 꿈꾸어 왔었다. 그는 끝 꼭지 부분에 두터운 천을 대고 꼼꼼하게 꼬맨 흔적이 있는 우산을 들고 다니곤 했는데, 어느날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며 그 우산을 유심히 보니 낡긴 했지만 흠 하나 없이 고치고 고친 흔적이 보였다. 불현듯 그 모습이 그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년이 넘게 동일한 주제로 외길 연구를 하던 그의 모습이 그 우산을 통해 연상되었다.
그는 74세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한주 전까지도 실험실에 나와 두 사람의 연구원과 함께 실험을 했다. 하루에 한 두번씩은 그와 마주치면서 꼭 한번 내가 파리에서 했던 실험에 대해 토론을 해봐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같은 주제였지만 그가 주장하는 바와 아주 상이한 결과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의 토론이 아주 유익할 거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오던 길에 과묵하게 서있던 내게 그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여기 온지 얼마 안되는 것 같은데 여기 오기 전에는 어데서 무얼 했는가?" "사실 파리에서 학위를 받을 때 박사님과 같은 주제의 일을 했었는데 그 결론이 박사님의 의견과 상반된 것이어서 여러 저널들로부터 거부당했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제가 쓴 논문 초고를 읽고 의견을 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아주 반갑게 그러마고 대답했고 다음날 나는 깔끔하게 정리된 초고를 그에게 드렸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복도에 붙어 있던 노란색 부고를 보았는데 그가 어제 아침에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거기 담겨 있었다.
그는 여러모로 나의 멘토였다. 하는 일의 성격과 관심 분야도 그랬고, 일을 할 때 보이는 낙천성도 그렇고, 과학 연구에 대한 가치 판단까지도 나는 그의 작은 흔적들을 소중히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아로 새기며 그 이후의 연구에 임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곤 했다. "기대했던 결과를 얻었다면 그것에 대한 컨트롤 결과가 나오기 전에 샴페인을 따라 마셔라."는 농담으로 피를 말리는 실험 마무리 과정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집착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또 어떤 분야의 세미나든 늘 맨 앞자리에 앉아 아무리 그의 연구 분야와 거리가 있을지라도 꼭 두세가지의 질문을 던져 지칠줄 모르는 그의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우리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만일 특허로 출원되었다면 그 댓가로 일년에 수천억을 거머 쥘 수 있을 법했던 Hybridoma제조방법에 대해, 그것이 오히려 특허로 출원되지 않아 왜 다행인지를 여러차례에 걸쳐 우리 동료들에게 말하곤 했다. 아래 글은 세자르가 "The Scientist"라는 잡지에 1993에 투고했던 글이다. 나는 지식이 공공재라는 생각을 그를 만난 후 지금까지 줄곧 하고 있다. 아래 글은 내가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단초를 제공했다.
과학적 발견에 대한 특허는 불공정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하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특허로 출원될 법한 아이디어가 우리 머리를 스치던 최초의 단초들과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던 때를 기억한다. 그즈음, 대학이나 정부출연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그들의 아이디어가 특허감이 될 것이라는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과학적 고려들에 의거해 일했었다. 당시 특허는 극히 드물었다.
근대 BT의 출현은 대단히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심지어 호기심에 근거해 일하고 있는 과학자들조차 “이것을 특허로 출원해야하나?”라는 질문을 새 발견이나 새 방법론이 실험적으로 성공할 때마다 던지게 되었다. 만일 이런 질문에 빠져 있는 과학자들에게 보다 뛰어난 사업적인 수완이 있었다면, 그나 그녀는 아마 실험 결과가 확실해지기도 전에 특허를 출원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미 특허를 출원하고 실험은 단지 그 다른 이의 특허를 증명하는데 쓰이게 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최근 유전자 염기 서열의 특허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점들과 관련된 여러 가지 개발들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이와 연관된 이슈들에 대해 주의깊은 눈길을 보내는 것이 과학 공동체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ICSU(International Council of Scientific Unions)가 염기 서열의 특허와 관련된 위험성에 대해 심각하게 재고할 것에 대해 천명한 것은 올바른 방향을 잡기 위한 좋은 출발이었다.
문제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나라들마다 서로 다른 특허원리에 대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우선 발명인데 반해 유럽은 우선 특허 개념이다. 또한 미국은 유예기간 개념인데 반해 유럽은 비공개원칙 개념이다. 더 나아가 법률가들과 과학자들은 같은 용어들을 쓰지도 않고, 같은 기준에 의거해 말을 하지도 않는다. 무엇이 이전에 정립된 사실들(과학적 판단에 의거)로부터의 명백한 연장(extension)인지 하는 판단이 어느 순간 소설(법률적인 판단에 의거)처럼 재구성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특허로부터 얻는 또다른 혜택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극단에서는, 현재로서는 어떤 명확하고 구체적인 암시조차 내놓지 못하는 과학지식에서의 도약이 이후 개발이나 미래의 셀 수 없이 많은 특허들의 초석이 될 수도 있다. 체세포 교잡법이나 대장균 내의 제한효소 메카니즘 등은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둘 모두 이를 바탕으로 한 이후 기초 과학 분야의 진보가 제대로 예측될 수 없었고, 때문에 특허로 출원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없었더러면 오늘날의 BT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
따라서 특허는 기본적으로 불공정하다. 그러나 아마도 특허는 종국에 사회에 혜택을 입힐 수 있는 물건들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할 것이다. 특허가 없다면 기업들은 그와 같은 개발들에 요구되는 막대한 금액을 소모할 계획조차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특허와 관련된 공식에 새로운 변수 하나를 설정해야 한다. 그것은 BT분야에서의 다분히 중첩되어져 존재하는 특허들의 복잡성과 다중성이 새로운 물질에 대한 개발을 저해하는 등의 문제점들을 만들고 있다는 주장이 아주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특허라는 유령은 단지 과학공동체에 새로운 긴장감만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호기심에 의거한 연구에 대체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기초과학 발전에 심각하고 원치않는 영향들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가운데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이 세자르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MRC-LMB멤버들인데 언젠가 이들에 대해서도 언급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오래된 신문 기사다 보니 사진을 설명하는 내용에 착오가 있다. 이들 중 6사람이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이 그것인데 사실은 사진에 나오는 7사람이 8개의 노벨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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