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2일 월요일

기계스의 반지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는 능력은 모든 범죄를 가능하게 만든다. 교육이나 훈련 덕분에 견고한 관계들이 만들어진 영역을 제외하면,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는 능력은 절대적인 방종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이다. 그 능력은 특히 사회적인 것 혹은 집단적인 감정이 개입될 경우 지극히 일관성 없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사회적인 것의 권위로 덮인 것들은 모두 나머지와 다른 곳에 놓이고, 따라서 관계들을 벗어난다." 시몬느 베이유, 중력과 은총, 184페이지 

인간에게 관계가 갖는 중요성은 작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고난 물질적 토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기게스는 전설 속의 인물인데 반지를 끼면 그 몸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반지를 끼고 왕을 암살한 후 자신이 왕이 되었다.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관계를 맺고 있음으로 가능하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다 한들 존재하는 자신이 왕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인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기게스는 반지를 끼면서 몸뚱이가 보이지 않게 된 것처럼 관계 속에서 스스로 배제되었다고 생각한다. 기게스는 그가 왕이 된 사실과 왕이 암살된 사실은 서로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으로 관계 짓지 않으면 그 어떤 관계도 생기지 않는다. 2와 2는 우리의 생각이 그 둘을 더해 4로 만들지 않으면 영원히 2와 2일 뿐이다." 시몬느 베이유, 중력과 은총, 185페이지

인간 개체를 톱니바퀴에 비유할 때, 인간간의 관계, 상호성, 또는 의존성을 배제한다면 두 개의 톱니바퀴는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 결과 하나의 체계내에서 작동하지 못하는 모양새가 된다. 각각의 톱니는 서로 무관하게 운동하고, 그 운동의 결과는 마치 서로 독립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만들어진 환상, 착각일 따름이다. 실제의 세계에는 이러한 배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배제를 변호하는 이념, 의견, 주장, 논증은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알리바이이거나, 범죄를 가능케하는 사회적 조건이 된다. 

2022년 6월 25일 토요일

메타인지-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2

공부한다는 것은 자기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임과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다. 따라서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효과적인 소통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인식과 타인의 마음읽기 과정이 조율되며 벌어지는 곳이 다시 VPC이다. 타인에 대한 회피 기제와 접근 기제를 조율하면서 자아(self)의 경계를 유지 관리하는 역할을 했던 VPC에서 자기인식과 타인의 마음읽기가 조율된다. 이로써 조율이 이뤄지는 두가지 쌍이 실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거라는 유추를 해볼 수 있다. 인간이 사회 속에 살면서 타인과의 상호작용 및 상호연관성에 대해 다양한 경험을 통해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내리는 판단들과 의사결정 및 선택에 VPC에서의 두뇌 활동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적 적응을 거치게 되고 그 결과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의 두뇌에서 VPC가 아주 발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메타인지가 중요한 까닭은 자신이 정말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혼동 없이 인지하는 능력이 학습 능력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은 타인의 마음 읽기 능력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을 때 그가 그를 수용하고 다시 건네는 반응 가운데 자신의 견해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이러한 관조를 통해 다시 보다 나은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학습법이 있겠지만 그중 가장 효과적인 학습법으로 '가르치기'를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공부는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많은 부분 자신과 관계를 맺는 타인을 통해 이뤄진다. 

2022년 6월 14일 화요일

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1

복내측전전두피질로 번역되는 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이하 VPC)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뇌속 부위이다. 우선 이 부위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접근-회피 간 균형을 모색하는 역할을 한다. VPC는 이 역할을 편도체와 측핵 사이의 줄다리기를 통해 수행한다. VPC가 편도체와 보다 빈번하게 상호작용하여 연결 강도가 커지게 되면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게 된다. 이를 인지심리학에서는 회피 기제라 칭한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사회적으로 받게 될 비난을 회피하는 기제라 할 수 있다. 반대로 VPC가 측핵과 보다 빈번하게 상호작용하여 연결 강도가 커지게 되면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타인을 의식하기 보다 자신을 내세워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커진다. 이를 접근 기체라 하는데 균형을 잃고 이 경향성이 극도로 커지면 타인의 비난이나 제반 반응에 대해 둔감하게 된다. 회피 기제가 작동하는 VPC-편도체 연결 강도가 거의 없는 경우를 우리는 사이코패스에게서 발견한다. 사이코패스의 경우 VPC-편도체 상호작용이 거의 없게 되면서 두 기제간 균형이 깨지게 된 것이다. 반대로 회피 기제가 너무 강하여 균형이 깨진 경우를 우리는 지나친 패거리 문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빈번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패거리 집단 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들의 비난을 회피하다 보면 패거리에 대한 충성심이 커지고 그 반대 급부로 그 패거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이 증가하게 된다. 그 결과 회피기제 쪽으로 편향된 사회에서는 패거리 문화가 문제적 현상으로 대두된다. 두 기제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는 것은 이상적인 사회 관계를 맺기 위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균형은 끊임 없이 자신에게 존재하는 편향성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재조정하여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일련의 성찰 과정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 



2022년 6월 12일 일요일

 우리 시대나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 버린 것들. 예전에는 그냥 그렇게 우리에게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없는 것들. 그게 그다지 소중했던 건지 모르고 그냥 살고 있다가 어느날 문득 떠오르는 추억이랄 수도 있고 회한이랄 수도 있고, 또는 아쉬움이랄 수도 있는 그런 것들. Volpedo의 그림을 보다가 바로 그중의 하나가 '산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살다보면 맨땅위에서 한나절이상 아무 목적없이 시간을 보내는게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절감하게 된다. 가을 햇살 내리쬐는 들판 흙길을 따라 하루 한나절 아무런 이유없이 걷고 또 걸어 봤던게 언제적 일이던가? 거기에 그림에서처럼 사랑하는 연인과 간간히 담소를 나누며 혹은 손을 잡았다가, 혹은 길가 너럭바위에 걸터 앉았다가 하면서 말이다.

Passeggiata amorosa (1901-1902), olio su tela, diametro cm 100, Ascoli Piceno, Pinacoteca civica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를 읽으며 우리가 잃은게 이러한 소일거리 산책만이 아니라 그 산책을 하고자 하는 마음까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헤세가 '크눌프'의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크눌프같은 인물들이 저를 사로 잡습니다. 그들은 '유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롭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유용한 인물들보다는 휠씬 덜 해롭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로 잡는 일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크눌프처럼 재능있고 영감이 풍부한 사람이 그의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크눌프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도 책임이 있다고.." 굳이 크눌프처럼 풍찬노숙을 하며 방랑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 주위에는 크눌프류의 사람들이 많았다. 인적 사항란에 빠지지 않고 나오던 취미항목에 여행이나 사진찍기 또는 그림그리기를 적어 넣었던 아는 형들, 후배, 친구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예외없이 다 옛날이야기들이 되었다. 예전에는 만나면 시나 소설이야기를 나누며 개똥철학을 무럭무럭 가꾸던 시간들이 있었다. 황태자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언젠가 하이델베르그를 가보고 싶다고 했고,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고 파리에서 칼바도스를 먹는 상상에 젖어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더 우리 사회에서 그런 모습들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상상이 그런 개똥철학이 그런 취미가, 그리고 크눌프 같은 부류의 사람이 전혀 유용하지 않다는 각성이 사회를 휩쓸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모여서 조기 유학이나 재테크를 이야기하고, 영어 회화책을 읽으며 유용한 구문들과 어휘들로 뇌리를 가득 채우고, 영어를 배우거나 자격증을 따기 위해 외국을 나간다. 이제 크눌프처럼 얘기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을 넘어, 제 앞가림, 가족의 앞가림을 방해하고 축내는 해악덩어리로 지목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보이는 크눌프는 이기적이며, 지극히 비윤리적인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바 문제인 것은 크눌프가 아니라 우리의 삐뚤어진 시선이다. 헤세가 이야기했듯이 크눌프는 유용하진 않다 하더라도 사회의 유용한 인물들보다 휠씬 덜 해롭다.

빈자리

사람에게 애원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 체계를 타인의 정신에 강요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다. 신에게 애원하는 것은 그 반대다. 신에게 하는 애원은 신의 가치를 자기의 영혼 속에 받아들이려는 시도이다. 우리가 집착하는 가치들을 더없이 강렬하게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우리 안의 빈자리이다.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38페이지

내 안에 빈자리가 있을 때 비로소 기도할 수 있다. 기도는 신에게 속한 가치에 대한 추구이다. 그 가치를 받아들여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는 일종의 노력이다. 그런데 신에게 속한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마음에 빈자리가 있어야 한다. 내가 지닌 가치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결과 그것의 경계가 존재해야 내 안에 빈 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고 옳다고 믿는 원리와 법칙이 한계 없이 무한한 경우에 대해 성립되고 적용된다고 믿는다면 내 안에 빈 공간이 존재할 수 없다. 과학적 지식과 원리와 법칙들에 대한 자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의 한계와 경계를 인정할 때 신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 땅과 하늘은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모든 상대적인 것은 절대적인 본질과 배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2022년 3월 10일 목요일

우리의 미래는?

우리는 어떠한 세상에 살고자 하는가? 가까운 미래에 세상이 어떤 모습을 갖추기를 바라는지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혹 이런 대답이 나올 수 있겠다. 손흥민보다 더 뛰어난 축구선수, 조성진 보다 더 멋진 연주를 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 BTS의 빌보드 기록을 갱신하고 그걸 훌쩍 넘어서는 뮤지션,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국인 소설가, 시인을 보유하고, 3-4년에 한 번씩은 과학분야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한국 사회를 말할 수도 있겠다. 삼성이나 현대를 뛰어 넘는 세계 수위권 기업들이 등장하고, 그 기업의 CEO는 제프 베조프나 마크 저커버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시야를 넓혀 더 폭넓은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선두 주자들이 즐비한 사회를 꿈꿀 수 있겠다. 매일 클릭해 들어간 포털 사이트에서는 이런 승전보들이 연일 소개되어 우리 사회의 높은 수준을 가늠케해줄 것이다. 학생들은 이러한 모습에 더욱 분발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여념이 없고, 학교는 그러한 최고들을 배출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에 최선을 다한다. 국가는 여기에 맞추어 정책을 가다듬고, 그에 조응하는 예산을 편성한다. 
어디 하나 막힘 없이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물 흐르듯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회는 대다수의 우리가 바라는 미래라 할 수 있다. 사회 모든 곳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고, 경쟁의 순기능으로 모든 분야의 맨 앞에 노력의 열매를 거둔 누군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경쟁의 결과에 맞추어 공정하게 보상이 주어진다. 이러한 사회에서라면 일론 머스크처럼 365조의 재산을 지녀도 문제 없다. 룰에 따라 경쟁했고 경쟁의 결과에 따라 보상을 받았으니 잘못된게 없다. 다만  나 역시 좀 더 노력해서 경쟁에서 이기고 더 많은 보상을 받으면 그만이다. 그 역시 공정하니 떳떳하게 누리는 보상이 될 것이다. 능력이란게 일부는 타고난 것일테고 그 나머지는 각자의 노력을 통해 길러진 것이다. 타고난 능력은 숙명에 해당하는 것이고, 길러진 능력은 노력의 산물이므로 모두 정당한 각자의 소유라 할 수 있다. 능력의 크고 작음에 대해 토를 다는 것은 그저 능력이 부족한 자들의 불평에 불과한 것이다. 무능은 자신의 책임이고 능력의 우월함은 철저한 자기관리의 산물이다. 이처럼 정당하게 갖춰진 능력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경쟁은 사회가 계속 진보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사회는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경쟁을 통해 요소 요소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성장은 또한 정당하게 이뤄지는 경쟁에 대한 보상을 한층 키워서 다시 경쟁을 촉진하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경쟁 지상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절차를 공정하게 뒤 바꾸어 놓으면 이러한 사회의 미래상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인가? 모든 체제와 절차가 완벽하게 공정하기만 하다면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나 1/n의 확률로 일론 머스크가 될 수 있으니 모두 거리낌 없는 꿈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사회는 자연의 섭리를 고스란히 존중하고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사회일까? 모든 분야에서 선택되고 집중되는 사람들과 배제되고 도태되는 사람들이 쉼 없이 발생하는 일은 이러한 자연스러움의 필연적인 귀결일까? 선택되고 집중되는 사람들은 순전히 책임을 다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니 고도의 자긍심과 독점적인 보상이 주는 삶의 혜택들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되는 것일까? 배제되고 도태된 사람들은 모든 룰이 공정함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자신의 노력 부족과 그로 기인한 무능함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주어진 결과에 불평 없이 승복하는 것이 마땅한 것일까? 이 질문들에 대해 그렇다고 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크게 고민할 필요 없이 이러한 사회를 꿈꾸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 질문들에 대해 뭔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면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 대다수가 의심의 여지 없이 꿈꾸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2021년 10월 8일 금요일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일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부침이라는 말이 있지만 최근 나에게는 일관된 가라앉음만 있었다. 도저하게 밀려오는 중력을 버팅기지 못하고, 끊임없이 가라앉았다. 깊이 가라앉은 채 멀리 보이는 내 옛모습은 부질없고 희미하기만 했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한국에 들어올 때 품었던 마음을 잠시 떠올리게 되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깊이 침잠했던 마음 자락이 보였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랬을까? 그러다 문득 내가 일생 동안 한번도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던 좁은 집 하나를 내 마음 속에서 보았다. 그 집은 주위에서 동력을 제공받아 느리게 움직였다. 나는 그 집에 갖혀 옴짝달싹 못한 채 아주 먼길을 거쳐 돌고 돌아온 것이다. 세상은 때론 높은 파장대의 이미지로 또는 낮은 파장대의 이미지로 창문을 통과해 기복은 있지만 꾸준히 모종의 에너지를 집안으로 실어 날랐다. 그렇게 움직이면서 많은 사람과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나를 이끌었고 밀쳐냈다. 매일같이 번잡하기 그지없는 사건들의 모자이크로 주변 풍경은 바뀌고 또 바뀌었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 놓인 영사기는 이 풍경을 이리저리 채집하였다. 녹화된 풍경을 편집하고 돌려보며 지도 비슷한 것을 스케치하기도 했다. '이게 이렇게 놓여야 하는거였는데', '이건 빠져야 되는 건데', '이런 그림이 대신 들어가면 좋을텐데' 이런 잡상들을 품으며 그 영상들을 음미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거하던 집은 '공부'하는 장소였던 것 같다. 주변으로부터 스며들어 오는 다양한 에너지를 통해 이리저리 움직이며 세상에 대응하고 응전하며 작고 큰 반응을 보였던 곳이 그 곳이었다.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글을 써보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러한 나를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공부하는지, 무엇을 공부하는지, 어떻게 공부하는지 일생을 두고 생각해왔으니 나를 정리하자면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제법 효과적인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