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4일 금요일

교육과 연구15-학문의 기본적 가정들

야스퍼스에 따르면 학문은 크게 네 가지 가정을 한다.
첫번째 가정은 논리법칙(Die Regeln der Logik)이다. 학문이 전개될 때 논리가 작용하는 과정에서 적용되어야 할 원칙들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주어진 주장에 대한 반박을 제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무엇을 생각하거나 인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어떤 생각을 진행하고 발전시켜 모종의 주장을 하려면 이 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논리의 법칙은 이처럼 어떤 논리적 가정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배제해버리는 것이나 반대로 그 가정을 절대적인 사실인 것처럼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 모두와 거리가 멀다. 또한 엄밀하게 정의될 수 없는 언어로 이루어진 논리적 가정은 논리법칙을 제대로 만족시키기 어렵다. 언어가 의미의 전달체로서 기능하려면 그 안에 담긴 의미나 개념의 모호함이 정확히 인식되어야 한다. 논리법칙을 수용하고 논리적 가정을 존중하는 것은 학문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논리적 가정을 존중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서있는 하나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 세계는 절대적인 세계가 아니다. 하지만 그 세계는 구체적인 세계이다. 즉 학문은 그 세계에 두 발 딛고 있는 상태에서만 작동한다. 학문의 타당성은 그 세계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이 서 있는 세계 속에서 타당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학문을 절대화시킬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번째 가정은 학문의 바람직함(dass Wissenschaft sein soll)이다. 학문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에게 학문이 지닌 바람직함을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입증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의 문제이다. 앎에 대한 의지가 발생하여 나오는 원천은 외부 어딘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의지의 자발성이 학문을 이끈다. 앎에 대한 열망이 학문에 대한 자기 긍정을 가능케한다. 따라서 자기 긍정으로부터 얻어지는 학문의 바람직함은 학문의 가정이이자 전제가 되는 것이다.
세번째 가정은 주제의 선택(die Wahl des Gegenstandes)과 관련된 가정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 즉 앎에 대한 의지를 쫓아 가는 사람은 무한하게 가능한 옵션 가운데 자신이 탐구할 주제를 선택할 때 탐구의 결과물인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닌 의지를 통해 선택한다. 그 의지는 어떤 동기에 기반한 것일 수도 있고, 모종의 직관으로부터 연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학문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앎에 대한 의지이다.
마지막 네번째 가정은 학문이 이념체계(Schemata der Ideen)에 의해 이끌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파편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념체계의 작용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념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특정 이념의 이끔은 줄곧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념은 등장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학문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만일 그러한 이끔이 없다면 우리는 학문의 전체적인 얼개를 불완전하게 나마 살필 방도가 없게 된다. 전체적인 얼개를 살피면서 우리는 학문에서 무엇이 보다 핵심이고 무엇이 덜 핵심인지, 무엇이 깊이 있는 이해이고 무엇이 피상적인 것인지, 무엇이 의미심장한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무엇이 전체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며 무엇이 파편적인 부분을 보여주는데 그치는지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학문을 하는 사람은 발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우연적인 요소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학문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분절된 발견과 그에 대한 해석이 일종의 맥락을 지니게 되고 그 결과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한편 학문에서 가정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야스퍼스는 그것을 도그마로 존재하는 세계관(Weltanschauung)이라 말한다. 편견없이 냉혹하게 수행되는 여러 실험과 분석 그리고 그에 따라 제기되는 다양한 반론이라는 필터를 통과해야 하는 것은 학문의 중요한 속성이다. 따라서 세계관은 엄밀한 의미에서 임시적이고 포용적이어야 한다.
이처럼 끊임없이 유동하는 것이 학문이라면 학문의 벡터 즉 방향은 아주 중요한 고려 항목이라 할 수 있다.

2019년 6월 4일 화요일

교육과 연구14-학문의 본질과 그 외양 사이의 격차

'학문 자체의 목적은 바로 학문이다.'라는 주장은 대체로 지지받지 못한다. 학문의 영역이 확장되고 그 내용이 심화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정보와 지식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들이 생산되는 방식 역시 공장의 생산 라인처럼 일련의 공유된 절차들로 변화했다. 지식의 생산자인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 이외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 일쑤이며, 자신이 생산한 지식이 파급시킬 광범위한 효과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문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주장은 갈수록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스퍼스는 진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보다 뿌리깊게 질문한다. 설사 인간이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이끄는지에 대해 모른다 할지라도 오로지 진리만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부각시켜주고, 무엇보다 사유(Denken) 속에서 우리 삶이 그것의 토대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러한 모색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학문이라는 게 야스퍼스의 주장이다. 학문의 본질과 그것이 이 시대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외양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다. 이 때문에 야스퍼스는 학문의 속성에 대해 좀 더 살핀다.
그 속성 중 가장 먼저 논의 되는 것이 학문의 기본 가정들(Voraussetzungen)이다.

2019년 6월 3일 월요일

교육과 연구13-학문의 궁극성과 앎에 대한 의지

야스퍼스는 학문이 지닌 결정적인 동기는 그것이 지닌 유용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기술의 적용이 지닌 한계가 분명하고, 위대한 발견들이 대부분 그것이 지닌 유용성을 염두에 두고 이뤄진게 아니라는 것이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근거이다. 학문이 이처럼 수단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나? 이 질문에 대해 야스퍼스는 조건부 긍정을 한다. 즉 앎에 대한 의지(wissenwollen)가 가장 기본이 되면서 중요하다는 조건하에서 학문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있다. 앎에 대한 의지는 쓸모에 대한 고려보다 우선한다. 어느 특정 교육이념을 바탕으로 지식을 살피자면 그것은 대규모 평준화 교육이 이뤄지는 사회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되거나 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의 요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은 지식의 어떤 면모이거나 일부 카테고리를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지식 그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다. 지식은 어떤 이념을 수용한 상태에서 전인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의 정도에 따라 그것이 지니는 의미의 강도가 달라지게 된다. 또한 지식은 보편적인 기준(Mass)과 형태(Form)를 지녔는지 여부에 따라 의미를 지니게 된다.
앎에 대한 의지는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순간적으로 일어난 호기심만으로 유의미한 지식을 낳을 수 없다. 호기심이 의지의 형태로 변형되었을 때에서야 그 자체로 동력을 지니게 된다. 지식을 생성하고 진전시킬 수 있는 요체가 된다. 오로지 인간만이 깨달음의 결과가 가져다 줄 여파가 클지라도 깨닫기 위해 노력한다. 생물 가운데 인간만이 깨달음의 과정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인간으로서 여긴다. 인간은 자신감을 주위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의 정체를 간파하고, 각각의 특별한 지식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고, 가능한 원대하게 지적 체계를 구성해가는 과정을 통해서야 얻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앎에 대한 의지'가 인간에게 일차적이고 중대한 이유이다. 이 의지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자아도취에 빠지도록 이끄는 잘못된 교육에 저항할 수 있고, 바로 이 의지를 통해 신념이 사라진 공허한 지적 상태나 더 이상 알기를 원하지 않는 마음을 극복할 수 있으며, 이 의지가 있을 때에야 주어진 '결과'에 대한 학습을 깨달음과 일치시키는 몰이해를 뛰어넘을 수 있다. '앎에 대한 의지'를 통해 인간이 만족을 얻을 때는 오로지 지식의 최전선이 탐구의 도약대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경계에 이르렀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