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아난 새 살점 아래로
생명을
본다.
갈라진 상처
거기 닿지 않는 아픔 하나 있어
집요하게 허공에 매달리는 빈손들의 아우성.
먼 길 돌고 돌아
달려오는 실핏줄.
바람이 가는 길은 들풀이 알고
겨울이 가는 길은 속 깊은 뿌리들이 알 듯
생명이 가는 길은 무릇 세상의
모든 상처가 알고 있다.
거실에 놓인 화초가
바람을 알지 못하고,
겨울을 껴안지 못하듯
지금 아프지 않은 것들은
생명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늘 그렇듯 꽃은 상처 위에서만 피고,
대지의 숨결은 온 밤 내내 꽃을 기다리며
상처를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긴 세월 지나
아문 생채기.
먼 길 떠난 모든 것들이
들려주는 그리움의 노래.
아! 우리 안의 상처여!
항상성.
생명 활동의 시점이자 종점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고유한 속성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자신이라는 하나의 개체가 이루고 있는 계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 이루고 있는 계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자신의 생명 현상을 구현해낸다. 이를 '살아 간다'라 표현한다. 삶은 우리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이러한 상호 작용들의 총체와 같은 의미이다. 비를 맞거나, 햇볕을 쬐거나, 공기를 들이 마시거나, 물과 음식을 섭취하거나, 만상을 바라 보고 듣고 만지며 느끼거나, 산화되는 땔감으로부터 온기를 얻거나, 중력에 힘 입어 대지와 들판과 산 위를 걷거나, 이 모든 활동은 우리가 의식하건 않하건 간에 우리의 몸이라는 계가 우리 주위의 수많은 다른 계들과 벌이는 상호 작용이다.
상처는 우리 각자 개체를 이루는 계가 잠시 그 외부의 계에 문을 열었을 때 벌어지는 우리 내부의 부산한 활동과 작용들의 평형이 이뤄낸 산물이다. 상처는 평온한 시기에 잠시 잊었던 것들을 떠 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나 아닌 것들과 나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계기를 상처가 제공하는 것이다. 생명이라면 스스로 던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답하는 방식으로 개체는 부산한 활동을 거듭한 끝에 자신이라는 계를 다시 유지한 채 굳은 살 한점을 남기게 된다. 상처.
누군가 굶주리거나, 절망하고, 절규하다가 혹 스스로 자신의 삶을 끝 마치거나, 뜻하지 않게 죽어 갈 때, 즉 우리 안의 상처들이 여기 저기서 끊임 없이 질문을 던질 때, 이를 회피한다면 이는 살아있는 계가 아니다. 길거리에 죽어 있는 고양이나 두더지의 시체처럼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개체는 이젠 자신이라는 계를 포기하고 외부와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 안의 상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작용하길 요구한다. 살아 있다면 우리는 너무도 당연히 응답해야 한다. 그처럼 소중한 질문들을 던져 준 우리 안의 상처들에 고마와하며..
아주 오래 전 허세욱 씨가 분신했을 때였다. 아니 그 전 아이를 보듬고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 내린 어느 젊은 엄마의 얘기를 들었을 때일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누군가 고공 크레인에서 뛰어 내렸을 때, 아니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곡기를 끊은 스님의 기사를 접했을 때일지도 모르겠다. 쉼 없이 던져지는 질문들. 그리고 이에 답할 줄 모르고 앞으로만 내지르는 죽어가는 사회. 상처를 무시하는 건 생명이 아니다. 생명이라면 스스로 던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들이 상처를 통해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생명 과학을 연구하는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아주 깊은 아쉬움과 번민에 잠기는 것은 우리 안에 상처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상처를 접하고 대하는 사회의 모습이 꼭 무엇을 닮았기 때문이다. 상처는 필연이다. 모든 개체가 살아가는 계에서 늘 존재하고 또 그를 치유하며 살아가고 진화하는 것이 생명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상처를 무시하고 더 나아가 상처를 짓밟고서라도 자기 자신의 증식과 성장만을 이루려는 것은, 그리고 그러한 성장을 권장하는 계는 무엇인가? 내 아는 바론 단 하나의 예가 있으니 곧 암세포와 그 조직이다. 암세포는 한번 자리를 잡으면 끊임 없이 성장한다. 벌써 70여년 전에 자궁암에 걸려 죽은 한 여인의 종양 세포는 지금도 세계 곳곳 실험실에서 무럭 무럭 잘 자라고 있다. 암세포로 이뤄진 조직은 그것이 몸 담고 있는 생명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 생명체가 아무리 큰 상처를 입었다 한들 당연히 관심이 없다. 그저 계속 자기 분열하고 성장하는 것만이 관심사이다. 그리고 무척 이 임무를 잘 수행한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은 항상성을 잃고 종결되고야 만다.
살아 있다면 상처가 던지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필경 어떤 질문이기 쉽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뭍 개체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또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
그 답을 기다리는 질문들이 오늘도 여기 저기서 던져지고 있다.
비명처럼,
절규처럼,
외침처럼..
항상성.
생명 활동의 시점이자 종점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고유한 속성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자신이라는 하나의 개체가 이루고 있는 계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 이루고 있는 계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자신의 생명 현상을 구현해낸다. 이를 '살아 간다'라 표현한다. 삶은 우리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이러한 상호 작용들의 총체와 같은 의미이다. 비를 맞거나, 햇볕을 쬐거나, 공기를 들이 마시거나, 물과 음식을 섭취하거나, 만상을 바라 보고 듣고 만지며 느끼거나, 산화되는 땔감으로부터 온기를 얻거나, 중력에 힘 입어 대지와 들판과 산 위를 걷거나, 이 모든 활동은 우리가 의식하건 않하건 간에 우리의 몸이라는 계가 우리 주위의 수많은 다른 계들과 벌이는 상호 작용이다.
상처는 우리 각자 개체를 이루는 계가 잠시 그 외부의 계에 문을 열었을 때 벌어지는 우리 내부의 부산한 활동과 작용들의 평형이 이뤄낸 산물이다. 상처는 평온한 시기에 잠시 잊었던 것들을 떠 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나 아닌 것들과 나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계기를 상처가 제공하는 것이다. 생명이라면 스스로 던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답하는 방식으로 개체는 부산한 활동을 거듭한 끝에 자신이라는 계를 다시 유지한 채 굳은 살 한점을 남기게 된다. 상처.
누군가 굶주리거나, 절망하고, 절규하다가 혹 스스로 자신의 삶을 끝 마치거나, 뜻하지 않게 죽어 갈 때, 즉 우리 안의 상처들이 여기 저기서 끊임 없이 질문을 던질 때, 이를 회피한다면 이는 살아있는 계가 아니다. 길거리에 죽어 있는 고양이나 두더지의 시체처럼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개체는 이젠 자신이라는 계를 포기하고 외부와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 안의 상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작용하길 요구한다. 살아 있다면 우리는 너무도 당연히 응답해야 한다. 그처럼 소중한 질문들을 던져 준 우리 안의 상처들에 고마와하며..
아주 오래 전 허세욱 씨가 분신했을 때였다. 아니 그 전 아이를 보듬고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 내린 어느 젊은 엄마의 얘기를 들었을 때일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누군가 고공 크레인에서 뛰어 내렸을 때, 아니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곡기를 끊은 스님의 기사를 접했을 때일지도 모르겠다. 쉼 없이 던져지는 질문들. 그리고 이에 답할 줄 모르고 앞으로만 내지르는 죽어가는 사회. 상처를 무시하는 건 생명이 아니다. 생명이라면 스스로 던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들이 상처를 통해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생명 과학을 연구하는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아주 깊은 아쉬움과 번민에 잠기는 것은 우리 안에 상처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상처를 접하고 대하는 사회의 모습이 꼭 무엇을 닮았기 때문이다. 상처는 필연이다. 모든 개체가 살아가는 계에서 늘 존재하고 또 그를 치유하며 살아가고 진화하는 것이 생명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상처를 무시하고 더 나아가 상처를 짓밟고서라도 자기 자신의 증식과 성장만을 이루려는 것은, 그리고 그러한 성장을 권장하는 계는 무엇인가? 내 아는 바론 단 하나의 예가 있으니 곧 암세포와 그 조직이다. 암세포는 한번 자리를 잡으면 끊임 없이 성장한다. 벌써 70여년 전에 자궁암에 걸려 죽은 한 여인의 종양 세포는 지금도 세계 곳곳 실험실에서 무럭 무럭 잘 자라고 있다. 암세포로 이뤄진 조직은 그것이 몸 담고 있는 생명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 생명체가 아무리 큰 상처를 입었다 한들 당연히 관심이 없다. 그저 계속 자기 분열하고 성장하는 것만이 관심사이다. 그리고 무척 이 임무를 잘 수행한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은 항상성을 잃고 종결되고야 만다.
살아 있다면 상처가 던지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필경 어떤 질문이기 쉽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뭍 개체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또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
그 답을 기다리는 질문들이 오늘도 여기 저기서 던져지고 있다.
비명처럼,
절규처럼,
외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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