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3일 화요일

BT vs Biology

벤쳐 캐피탈 얘기를 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눈먼 돈이란 얘기를 가끔하게 되는데 바이오 벤쳐로 몰려든 돈들 역시 그 범주에 속할 듯 하다. 아니 속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범주의 전형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분자 신약이라는 분야에서 대략 10년 정도 실험을 했다. 그것도 세계적인 선두 그룹의 일원으로 그 실험들을 진행했다. 분자 신약은 유전 생명 공학이 의료 시장에 접근하는 첩경쯤으로 여겨져 왔다. 아니 아직도 그러한 믿음은 많은 제약회사나 투자자들로 하여금 투자와 개발의 의욕을 담금질하도록 만드는 동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생물학의 산물이 얼마나 큰 시장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만한 식견 역시 없다. 다만 생물학을 비롯한 학문의 값어치가 그것의 시장친화성에 의해 저울질되는 작금의 현실을 향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분자 신약은 많은 연구를 통해 현존하는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수년 내는 아니겠지만 언젠가 질환치료제 중 중요한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생물학을 향한 사람들의 오해로부터 기원한다.


보통 사람들이 IT, BT, NT할 때 BT는 Biotechnology의 약어일 것이다. 이는 Biology가 기술로 이전되는 것을 그 지향점으로 이뤄지는 연구활동을 총칭하기 위해 등장한 다분히 작위적 개념어이다. 우리는 BT와 Biology라는 두 영역을 앞에 두고 여러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두 영역은 어떻게 구분되어지는 것인가?
두 영역은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고 있을까?
두 영역이 발전하고 진보해 나가는 경로는 서로 일치할까?
이러한 질문들을 두고 답하고자 할 때 상당히 막연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까닭은 BT라는 개념이 지니고 있는 작위성으로부터 연원하는 것 같다. 어떤 학문 자체와 그 학문의 응용 가능성이라는 범주는 서로 그 층위가 상당히 다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Biology를 얘기할 때 BT와 혼재된 개념 정도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Biology가 생성, 성장, 변모해가는 고유한 메카니즘이 상당한 정도 무시되거나 왜곡되어진 채 BT라는 개념속에 흡수 통합되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사실 Biology의 상당히 큰 영역은 기술로 이전되기도 힘들뿐더러 따라서 시장 친화적일 수도 없다. 기술 이전을 통한 시장의 확보는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사회체계에서 그 의미를 지니게 된 사회현상일 따름이다. 


하지만 Biology라는 학문 자체가 자본주의적일 수는 없다. 물론 'Biology라는 학문 자체'라는 가상의 범주를 설정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 어짜피 모든게 유기적일테고 거기서 학문이 예외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Biology라는 학문의 대상을 염두에 두고 보면 조금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생물, 동물, 식물등 생명체가 작동하는 원리와 그것들이 서로 맺는 관계. 이러한 것들이 Biology의 연구 대상이라면 사회체계나 이념 등과 상당히 독립적인 것들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물론 Marx가 자본론에서 언급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 중 하나인 물신주의(fetishism)는 이처럼 독립적인 대상들조차 치밀하게 자기 내부로 끌어들이고 연관시켜낸다. 생명현상들 가운데 돈이 될만한 것들만 눈에 보이게 되는 건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속성이 작용한 결과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의 시야의 문제일 따름이다. 생명현상이라는 대상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관점과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작동하고 변모한다. 바로 여기에 BT와 Biology사이의 괴리가 있는 것이다.

돈이 있는 사람들이 돈이 되는 일들을 만들고, 돈이 될만한 일들을 하여 돈을 벌고 있다. 세상을 설명하는 아주 간명한 어구일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지금 실험을 하는 연구실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다. 실험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 돈이 있으려면 돈이 될만한 실험을 해야 한다. 따라서 돈이 될만한 실험을 하는 사람들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더 많은 돈이 될만한 실험을 계획하고 진행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돈이 될만한 실험'이 곧 '해당 사회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성취하는 실험'이거나 '학문의 성장에 크게 이바지하는 실험'이라는 보장이 없다. 아니 많은 경우 그 둘은 서로 상충하거나 배제하기 일쑤이다. 

바로 여기서 생물학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2학기에 열릴 '생체분자론'의 첫 시간은 에른스트 마이어의 'This is biology'로 시작한다. 생물학의 역사와 그 체계를 세밀하게 고찰하다 보면 '자연철학'으로서의 생물학과 '응용과학'으로서의 생물학이 어떤 계통도를 가지고 발생 변모되어 왔는지 윤곽을 잡을 수 있다. 이러한 탐색의 도처에서 참 많은 질문들이 불쑥 불쑥 튀어 나온다. '생명'을 이해하는 환원주의적 접근과 유기체주의적 접근 사이에는 어떤 긴장이 존재하는지, 생명을 인간이라는 좁은 시스템에서 볼 때와 자연이라는 보다 큰 시스템에서 볼 때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그 질문 하나 하나가 굵직하다. 답이 뚜렷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가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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